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이메이 황후 (문단 편집) === 자녀 === [[파일:726px-Emperor_Taisho's_sons_1921.jpg|width=400]] > 왼쪽부터 장남 히로히토, 4남 다카히토, 3남 노부히토, 차남 야스히토 오랫동안 적자 계승이 드물고 그녀의 남편조차 후궁 소생이었으나 그녀는 건강한 아들 넷이나 낳았다. 그러나 혼란스러운 시기였던 탓에 네 명의 황자들은 결혼 이후 평생 아이를 갖지 못하거나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거나 패전의 삶을 살아야했다. * 장남 [[미치노미야 히로히토]](迪宮裕仁) 친왕(1901-1989): 훗날의 [[쇼와 덴노]]. 방계 황족 [[구니노미야 나가코]] 여왕과 결혼하여, [[아키히토]] 덴노를 포함한 2남 5녀를 낳았다. * 차남 [[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|아쓰노미야 야스히토]](淳宮雍仁) 친왕(1902-1953) : 만 20세가 되던 1922년, 지치부노미야(秩父宮)라는 [[미야고]](궁호)를 받았다. 1928년, [[아이즈 번]]의 마지막 [[다이묘]]인 [[마츠다이라 카타모리]]의 손녀 [[마츠다이라 세츠코]][* [[이방자]] 여사의 이종사촌 여동생이기도 하다.]와 결혼했다. 세츠코 비는 한 차례 [[임신]]했으나 [[2.26 사건]] 당시 유산되었고, 이후 자녀를 낳지 못했다. * 3남 [[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|데루노미야 노부히토]](光宮宣仁) 친왕(1905-1987) : 1913년, 대가 끊어질 위기에 놓인 [[아리스가와노미야]] 가문을 계승, 다카마쓰노미야(高松宮)라는 미야고를 받았다. 1930년, [[에도 막부]] 마지막 [[쇼군]]인 [[도쿠가와 요시노부]]의 손녀이자 방계 황족 [[아리스가와노미야]] 가문의 외손녀인 [[도쿠가와 키쿠코]]와 결혼했다. 자녀는 없는데, 노부히토 친왕에게 [[동성애]]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말도 있다.[* [[노부히토]] 친왕과 [[키쿠코 비]] 내외도,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조카며느리 [[미치코 상황후|미치코 황태자비]]를 멸시했다. 자세한 것은 [[미치코 상황후/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]] 항목을 참조.] * 4남 [[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|스미노미야 다카히토]](澄宮崇仁) 친왕(1915-2016) : 바로 위의 형인 [[노부히토]] 친왕보다도 10살이나 어려, 데이메이 황후는 전통을 깨뜨리고 막내 다카히토 친왕을 자신의 품에서 직접 키웠다. 만 20세가 되던 1935년 미카사노미야(三笠宮)라는 미야고를 받았고, 1941년 [[화족]] 다카기 마사나리(高木正得)[* 패전 이후 [[신적강하]]로 신분과 재산을 잃는 등 어려움을 겪다가, 1948년에 자살했다.] 자작의 차녀인 [[다카기 유리코]]와 결혼했다. 3남 2녀를 낳았으나 장남 [[토모히토]] 친왕, 차남 [[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]] 친왕, 3남 [[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]] 친왕 모두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보다 먼저 죽어서, 미카사노미야 가문도 다른 [[미야케#s-3]](宮家)와 마찬가지로 절손되었다. 히로히토의 장녀 히가시쿠니 시게코가 '다이쇼 덴노가 살아 생전에 본 유일한 손주'라면, 센 마사코[* 할머니 데이메이 황후가 세상을 떠난 지 5개월 후에 태어났다.]와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는 (다이쇼 덴노의 아내인) 데이메이 황후가 살아생전 볼 수 없었던 유이한 손주'이다. 한편 다카히토 친왕은 생전 [[진무 천황]]을 실재한 인물이 아닌 신화의 영역이라고 주장했으며, [[난징 대학살]]이나 [[관동 대지진]]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 사죄와 재평가의 필요를 언급하는 등 [[개념]]있는 모습을 보인 인물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